Stage -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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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약이 될까 독이될까? 일 포스티노를 보는 내내 생각했던 질문이다.

예술은 인간의 자의식을 높여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달리 보게 만드는 기능이 있는 반면 생각이 확고해짐에 따라 다른 생각을 가진 집단과의 마찰을 크게 만드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 마리오는 파블로를 만나면서 시에 눈을 뜨게 되고, 첫눈에 반한 여자를 은유라는 언어를 통해 유혹하여 결혼까지 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공산주의 시위에 자신의 시를 발표하기 위해 참여했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마리오가 ‘시’에 눈을 뜨지 않았다면 그는 더 오래살 수 있지 않았을까? 애초에 저항하려는 생각이 없었을 뿐더러 공산주의 집회에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참 아이러니하다.

 

 

비록 마리오는 시로 인해 일찍 죽음을 맞이했지만 시를 배운 이후의 그는 자신에 대해 훨씬 주체적인 모습으로 바뀐다. ‘나는 멍청이가 아닙니다’ 라면서 의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수도관을 놓는 것을 철회하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고, 칠레로 돌아간 파블로에게 이렇다할 연락을 받지 못하자 그를 위해 주변 환경의 소리를 녹음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지막에는 대중 앞에서 시를 낭독하게 되어 행복하다는 말까지 한다. 시가 마리오의 자의식을 깨워 준 것이다. 

 

 

 

 

 

이런 마리오의 모습은 파블로에 의해 ‘계몽’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계몽’의 사전적 정의는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 이다. 파블로는 지식수준이 낮았던 마리오를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시에 대한 지식을 높임으로서 계몽 시켰고 자의식을 깨웠다. 하지만 계몽의 결과는 마리오의 죽음이었다. 이런 ‘계몽’이라는 행위에 대해 어떻게 보아야 할까? 계몽되지 않고 전에 살던대로 사는게 나은걸까? 아니면 새로운 안경을 끼고 새롭게 세상을 보는 것이 나은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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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자발적 계몽’이라면 계몽이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마리오는 파블로와 교류하면서 시에 대한 재미를 느꼈고 닮고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이것은 그의 내면에서 어떤 본능적인 끌림이 있었던 것이다. 어떤사람은 파블로라는 대문호를 보고 전혀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이라면 애초에 끌림이 없었을뿐더러 시를 배우고자 하는 욕구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직관’이라는 것이 있고 본능적으로 자신이 끌리는 것을 좋아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마치 사람들 하나하나가 적성과 흥미가 다르듯이 말이다. 마리오의 직관으로는 ‘시’라는 매체가 자신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매체였고 그런 매체를 능숙하게 다루는 파블로에게 끌려 그가 말하는 것들을 스펀지 처럼 흡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계몽’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이런 의문이 생긴다.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에 계몽적인 요소를 집어 넣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일까? 

그 전에 ‘현대적인 계몽’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겠다. 과거 18세기의 ‘계몽주의’는 미신을 타파하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을 강조하였지만, 현대사회는 이미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이 당연시 되는 사회가 되었다. 과거의 계몽은 더 이상 그 효과를 찾기 힘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에는 ‘계몽’은 더 이상 필요없는 것일까? 나는 새로운 개념의 계몽이 지금도 진행중이고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는 온갖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자극적인 것 위주로, 질보다는 양에 초점을 맞추어 인스턴트식 컨텐츠가 계속해서 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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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스마트폰의 발명으로 인해 언제 어디서든 쉽게 정보를 찾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런상황에서 ‘사유’를 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보던 것들을 낯설게 만들고, 습관에 젖어 문제의식이 마비된 뇌를 잠깐이라도 의심할 수 있게 깨어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현대적 계몽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주제에 대해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더라도 사람들에게 기존의 진부함과 고정관념을 벗어나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에 계몽적인 요소를 넣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일까?’ 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적어도 ‘작품성’ 있는 작품을 만들려면 계몽적인 요소를 넣는게 꼭 필요하다고 본다. 예를들어 영화를 평가할 때 ‘상업성’과 ‘작품성’을 나누어 평가하는데, 이때의 상업성이란 대중들이 영화에서 ‘재미’를 느끼는지에 관한 것을 말한다. 나머지 ‘작품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겠지만 나는 작품을 보고 대중들이 얼마나 발전적인 ‘사유’를 하게 만드느냐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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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영화를 하나 예로 들어보겠다. ‘위플래쉬’를 보고 나온 관객은 선생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 학생을 학대하듯 가르치는게 결과적으로 보면 학생에게 엄청난 발전을 가져 온 것을 보고 고민에 빠질 것이다. 저렇게라도 성공하게 하는게 맞는 것일까? 차라리 포기하고 다른길을 찾는게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 더 나은게 아닐까? 등등... 평소에 뻔하다고 생각했던 선생과 제자 사이를 새롭게 인식하며 성공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줄수록, 다시말하면 ‘계몽’적인 요소가 많을수록 작품의 깊이는 깊어지고 한번만 보고 마는 인스턴트식이 될 가능성이 줄어든다. 그래서 예술가인 사람은 ‘작품성’있는 작품을 만들려면 계몽적인 요소를 최대한 넣어야 된다고 본다.

 

 

맨 처음으로 돌아가 예술이 한 개인에게 독이될지 약이될지는 섣불리 판단하기 힘들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장단점을 가지고 있듯이 개인이 예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장점이 더 부각될 수도 있고 단점이 부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에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단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장점으로 바뀔 수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예술’이 삶을 바라보는 다양한 안경을 만들고, 제공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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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포스티노라는 영화는 겉으로는 시에대해 말하는 것 같지만 깊게 보면 예술 자체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 같다. 

예술이 한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는지, 우리는 그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지 등등 다양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면서 말이다. 이 영화는 파블로가 마리오를 계몽시킨 것 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로 우리 관객들에게 막연히 생각했던 예술이라는 것에 대한 계몽을 유도하고 있는게 아닐까? 팝콘영화가 난무하는 요즘 오랜만에 뇌에 자극을 주는 영화를 보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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